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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부동산 브리핑

115층의 꿈에서 49층 현실로, 현대차 GBC가 겪은 12년의 변곡점

by 오늘의 부동산 브리핑 2026. 1. 17.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 맞은편, 유난히 넓고 텅 빈 부지를 볼 때마다 궁금했다. 도심 한복판의 황금 땅이 이렇게 오래 비어 있을 수가 있나 싶었는데, 바로 현대차그룹의 신사옥 부지였다. 이름은 ‘GBC’, 글로벌비즈니스콤플렉스. 말 그대로 그룹의 심장 역할을 하게 될 공간이다.
이 부지는 한때 115층짜리 초고층 빌딩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서울의 하늘을 새로 그릴만한 규모였다. 하지만 지금은 49층짜리 세 개의 타워로 설계가 확정됐다. 높이의 숫자만 보면 아쉬움이 남지만, 그 사이에 겹겹이 쌓인 시간과 사정들을 알고 나면 단순한 축소가 아니라 현실적 조정이라는 생각이 든다.

 

뚝섬에서 삼성동으로, 계획의 첫 전환점

처음부터 삼성동이 후보지는 아니었다. 현대차가 눈독을 들인 곳은 성수동 삼표레미콘 공장 자리였다. 이른바 ‘뚝섬 부지’. 110층짜리 본사를 세울 계획이 있었지만, 당시 서울시가 50층 이상 초고층 건물은 도심이나 부도심에만 허용한다는 방침을 내면서 무산됐다.
그 무렵 공공기관 지방 이전 정책으로 한전이 나주로 옮기면서, 삼성동에 거대한 빈땅이 생겼다. 축구장 열두 개 규모의 금싸라기 땅. 서울시는 코엑스부터 잠실종합운동장까지를 묶어 국제교류복합지구로 개발하겠다는 구상을 내놨고, 이 안에 포함된 게 바로 이 부지였다.
2014년, 그 땅을 두고 현대차와 삼성전자가 입찰 경쟁을 벌였다. 감정가 3조3,000억원짜리 땅에 현대차는 무려 10조5,500억원을 써냈다. 결과는 압도적이었지만, 이후 ‘승자의 부담’이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그래도 당시 정몽구 회장은 “100년을 내다본 투자”라고 단언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말이 단순한 자신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초고층의 꿈을 누른 것은 국방부였다

토지 매입 후 설계는 바로 105층으로 시작됐다. 서울시는 대신 용적률을 대폭 올려주며 공공기여금 약속을 받았다. 현대차는 1조7,500억원을 내고, 꼭대기에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전망대를 짓기로 했다.
그런데 돌발 변수가 생겼다. 국방부였다. 초고층 건물이 서울공항 인근 레이더를 방해할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 문제를 푸는 데만 몇 년이 걸렸다. 결국 2020년에야 착공식을 열었지만, 팬데믹이 덮쳤다. 자재비는 폭등했고, 안전성 논란도 커졌다. 초고층의 상징이 부담으로 돌아온 시기였다.
그때 정의선 회장이 직접 칼을 빼들었다. 105층에서 55층 두 개동으로 바꾸자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서울시는 “그 정도면 강남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규모”라며 반대했다. 초고층을 전제로 완화된 용적률을 되돌려야 한다는 논리였다. 결국 협상을 다시 하게 됐고, 지난해 말 최종적으로 49층짜리 세 개의 타워로 합의됐다.

 

49층이라도 낮은 건물은 아니다

49층이라는 숫자만 보면 작아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층고를 높여 전체 높이는 크게 줄지 않았다. 오히려 공간의 질과 활용도를 고려한 설계로 바뀐 것이다.
각 타워에는 현대차그룹 계열사의 업무시설과 호텔, 판매시설이 들어가고, 지상에는 대규모 전시장과 공연장, 도심 숲이 함께 조성된다. 서울시와의 협상 과정에서 감면받았던 공공기여금 일부(약 2,300억원)는 다시 내기로 했고, 총액은 약 1조9,800억원에 달한다.
서울시는 이 기여금을 국제교류복합지구 조성에 투입한다. 잠실주경기장 리모델링, 명동대로 복합환승센터, 옛 한국감정원 부지 개발 등으로 이어지면서 GBC는 단독 프로젝트가 아닌 도시 재편의 중심축이 된다.

 

강남의 동쪽, 오랜 침묵이 깨어지는 구간

GBC 소식이 본격화되자, 잠삼대(잠실·삼성·대치) 지역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이 일대는 이미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묶여 있어 거래는 쉽지 않지만, 기대감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 그동안 반포와 압구정에 비해 오르지 못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번 개발이 균형을 맞출 계기가 될 가능성이 있다.
물론 기대감이 이미 상당 부분 가격에 반영된 건 사실이다. 하지만 도심 한복판에서 이런 규모의 복합 단지가 새로 들어서는 일은 드물다. 특히 코엑스와 봉은사, 영동대로, 잠실운동장까지 이어지는 동선이 하나의 경제 벨트로 묶이게 되면, 이 지역의 위상은 단순한 ‘강남’이 아니라 ‘서울의 글로벌 비즈니스 허브’로 바뀌게 된다.

 

초고층의 로망 대신 도시의 균형을 택한 선택

처음 115층 계획이 나왔을 때는 단순히 ‘서울의 랜드마크’라는 말이 따라붙었다. 하지만 지금의 49층 안은 그때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지속 가능하다. 초고층은 화려하지만, 유지비와 안전 부담이 크다. 도시의 스카이라인을 새로 그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람들이 실제로 일하고 쉬는 공간으로서의 효율도 무시할 수 없다.
지금의 GBC는 그런 균형점을 찾아가는 과정의 결과다.
2031년 완공 예정인 이 프로젝트가 마무리되면, 그때의 삼성동은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과 전혀 다를 것이다. 한때 ‘텅 빈 땅’으로 남아 있던 자리가, 도시의 흐름을 다시 바꾸는 중심축이 된다.
그리고 어쩌면, 115층보다 낮지만 더 단단한 건물이 될지도 모르겠다.